려명기사

주체102(2013)년 6월 11일 《려명》

 

력사일화

 

정몽주와 그의 일화 (4)

 

정몽주(1337~1392)는 고려말기의 수문하시중의 벼슬을 지낸 관리로서 고려왕조를 지키기 위하여 한목숨바쳐 싸운 충신이였다. 그는 나라의 정사에서나 외교에서 공을 세워 인민들로부터 신망이 높았으나 리성계일파에 의하여 피살되였다.

 

왜구의 소굴에서

 

우리 나라에 대한 왜구의 침습을 종식시키기 위한 문제를 가지고 정몽주가 일본으로 담판하러 간것은 1377년 9월이였다.

당시 고려말기 근 40년동안 우리 나라 남쪽해변가에서는 왜구의 침습이 멎을 날이 없어 백성들은 실로 모진 고통에 시달리고있었다.

일본의 도적떼들은 배를 타고 경상도와 전라도 해안지대에 달려들어 재물을 략탈해갈뿐아니라 부녀자와 어린아이들까지 함부로 죽이고 랍치해가는 만행을 부리였다. 이때마다 고려의 관군들이 달려나가면 어느새 도망쳐버리군 하였다.

왜구들의 빈번한 침습과 만행은 우리 나라 남쪽해변가와 지어 내륙깊이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커다란 고통을 주고있었다.

고려정부에서는 해변가의 군사력을 강화하고 방비를 철저히 갖추는 등 왜구의 침습을 막기 위한 대책을 여러모로 세워왔으나 놈들의 행패는 좀처럼 멎을줄 몰라 몹시 골머리를 앓고있었다.

그리하여 고려정부에서는 방비를 강화하는 한편 일본과의 평화적인 교섭의 길에 나서게 되였다.

1375년에 고려정부에서는 라흥유를 일본에 보내여 왜구의 침습을 막기 위한 평화적교섭을 벌리게 하였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라흥유를 달갑게 여기지 않던 나머지 렴탐군으로 몰아서 옥에 가두는 행패까지 부리였다. 라흥유는 한해동안이나 놈들의 옥에 갇히여 죽을 고생을 하다가 겨우 목숨만 건져가지고 돌아오게 되였다.

그러니 결국 평화적교섭은 성사시키지 못하였고 오만해진 놈들의 침습은 날로 더욱 심해져 남해해변가 고을들은 가을을 한 들판과 같이 텅 비게 되고 백성들의 탄식과 원성은 더욱 높아갔다.

이런 형편에서 백성들이 안착해서 살수도 없고 그들이 조세도 제대로 바치지 못하니 국고가 비여 나라의 형편도 어렵게 되였다.

이리하여 고려정부에서는 다시 왜구의 침입을 종식시킬데 대한 문제를 가지고 의논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이 의논끝에 한번 더 일본에 평화적교섭을 위한 사신을 파견하게 되였다.

전번에 라흥유가 크게 실패하고 돌아왔지만 일본사람들을 설득시킬만 한 적임자를 골라보내면 소득이 있지 않겠는가 하는것이였다.

이때 당시 권력을 쥐고있던 리인임이 정몽주를 추천하였다.

리인임이 정몽주를 추천한데는 두가지 리유가 있었다. 그 하나는 정몽주가 인품이나 도량, 지식에서 뛰여났으며 외교술에서도 능란하였기때문에 이미 명나라와의 관계에서 정몽주의 외교활동이 큰 역할을 하였던것이다. 다른 하나의 리유는 리인임이가 정몽주를 시기질투하였기때문이다. 리인임은 당시 외교에서 원나라와의 친교를 주장했고 정몽주는 명나라와의 친교를 주장하였다. 이런 대치되는 주장으로 하여 리인임은 자기 권세를 리용하여 이미 몇해전에 정몽주를 경상도 언양이라는 깊은 산골로 귀양보냈던것이다.

그런 사람을 일본에 보내서 라흥유와 같이 고통을 당하게 하거나 아니면 잘못되여 돌아오지 못한다 해도 그리 가슴아픈 일이 아닐것이며 도리여 자기를 반대하는 세력의 한 인물이 없어지는것으로 될것이기때문에 손해볼것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리인임의 작간으로 정몽주는 왜구와의 평화적교섭을 위한 고려정부의 사신으로 일본에 파견되게 되였다.

귀양지에서 이런 지시를 받게 된 정몽주는 리인임의 속심을 모를수가 없었으며 자신이 일본으로 가는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하는것도 잘 알고있었다. 또한 왜구들이 얼마나 횡포하고 교활한가 하는것도 모르는바가 아니였다.

그러나 정몽주는 일본으로 가게 된 사연에 그 어떤 더러운 음모가 있다 해도 또 생명까지 바쳐야 하는 위험한 길이라 해도 나라와 백성을 위해 꼭 가야만 하는 길이라는 생각에 기꺼이 마음을 굳게 다지며 떠났다.

왜구의 침습을 하루빨리 종식시키는것은 나라와 백성을 위해 절박한 문제라는것을 그 누구보다 가슴저리게 느껴온 그였다.

정몽주는 몇년전에 경상도 안렴사로 파견되여나간적이 있었다.

정몽주가 안렴사에 있는 동안 왜구들의 침습으로 마을이 황페화되고 사람들이 쓰러지고 잡혀가는것을 무수히 목격했던것이다. 이때 그는 불타버린 집터, 피흘리며 쓰러진 사람들을 보며 왜구들의 침습을 막지 못함을 두고 울분을 터뜨리고 가슴을 두드렸다.

그래서 일본으로 떠나는 그의 마음은 어떤 위험이 가로놓여도 기어이 놈들을 굴복시키고 돌아오리라는 결의로 불탔다.

정몽주는 왜구들의 소굴인 일본의 규슈에 도착하였다. 전번에 라흥유가 왔다가 옥에 갇히웠던 곳이였다.

정몽주는 놈들의 관청에 찾아가서 고려의 사신이 도착했다는것을 알리면서 두목을 만날것을 청원하였으나 놈들은 다짜고짜로 정몽주를 옥에 가두었다. 옥에서 전하는 말이 《고려사신이라면 쓸데없는 수작을 하러 왔겠으니 귀찮다.》라고 하면서 가두라는 분부가 내렸다는것이다.

정몽주는 어이없었고 맹랑했다. 이런 일을 예상치 못한것은 아니였지만 왜놈들은 과연 무례하고 도덕이 없는 놈들이라는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였다.

하지만 이렇게 나라의 사신이라는 명목으로 와서 왜놈의 두목을 만나지도 못하고 옥에 갇히우니 너무도 억이 막히고 분하였다.

그러나 정몽주는 분을 삭이며 조용히 생각해보았다.

이미 알고있는 일이지만 일본사람들은 원래 성미가 조폭하고 교양이 없으니 이런자들에게서 관례를 바라며 례의가 없다고 나무랄수 있겠는가, 온 목적도 사람이 못됨을 꾸짖고 추궁해주자는것이 아니라 우리 나라에 침입하여 다시는 도적질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데 있으니 그 목적을 위해 참고 행동하는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정몽주는 생각끝에 왜놈두목 이마가와에게 부드러운 문장으로 편지를 써보내였다.

《고려의 사신 정몽주가 삼가 글을 올리는바입니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자기 집에 찾아오는 사람을 반가히 맞는것을 하나의 도리로 여겨왔습니다. 그래서 옛날의 성인도 비록 도적이 오더라도 문을 활짝 열고 맞았다고 하지 않나이까. 이것은 예로부터 손님을 박대하지 말라는것을 일러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한 나라의 왕의 명을 받들고 찾아온 사신을 어찌 만나 한마디 말도 나누지 않고 옥에 가둘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귀국에서 외국사신을 가둔것이 정당치 못하다고만 주장하는것이 아니옵니다. 가둘수 있다고도 볼수 있지만 그래도 찾아온 사신이 귀국에 리로운 일로 왔는가 아니면 해를 주러 왔는가를 알아보고 가두던가 대접한다던가 하여야 옳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저의 청은 우리가 온 뜻이 무엇인가를 우선 알아보고 다음에 처분해도 늦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편지를 보낸뒤 얼마 안있어 정몽주일행은 옥에서 나와 두목이 있는 관청으로 안내되여갔다. 아마 정몽주의 편지에서 두목이 느끼는바가 있었던 모양이였다.

두목인 이마가와가 일어나 나오며 먼저 인사했다.

《사신으로 오신분을 잘 알아보지 않고 함부로 대해드려 죄송합니다.》

《오해를 푸시고 이렇게 맞아주어 기쁩니다.》

정몽주는 조금도 불쾌한 빛을 내보이지 않았다.

《고려에서 무슨 일을 하십니까?》

《성균관 대사성입니다.》

《그렇습니까? 매우 높으신 학자님이시옵니다.》

《뭐 학자라고까지 부를만큼 학문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저 학문을 즐겨할뿐입니다.》

정몽주의 이러한 겸손에 이마가와는 저으기 호감을 가지게 되였다.

《이번 사신으로 오신 뜻은 무엇입니까?》

드디여 이마가와가 먼저 본론을 내놓았다.

《우리 두 나라사이를 화평하게 맺어 지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그러기를 바라고있는중이올시다.》

《그런데 여직 두 나라사이에 화평스럽지 못한 일들이 자주 생기군 하는것이 문제로 되고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근래에 와서 당신네 나라 사람들이 우리 해변가에 들어와 재물을 빼앗아가고 우리의 사람들을 죽이고 붙잡아가고있는것입니다.》

《…》

두목 이마가와는 인차 대답을 못했다. 가슴이 찔리는 모양이였다.

정몽주는 숨돌릴 틈을 주지 않고 들이댔다.

《그래 그런 사실을 아십니까?》

《그런 일이 더러 있은것은 사실이요. 하지만 낸들 어찌겠소. 그들이 당장 먹을것이 없어 굶주려 죽을 판에 그런짓을 하는것을 어찌 한두마디 말로 그치게 할수 있겠습니까.》

이마가와는 더 변명할수 없는 사실에 고백은 하였으나 어쩔수 없다는 도적의 본심을 드러내놓았다.

이에 정몽주는 분격이 치밀었으나 애써 참으면서 도량있게 대답해주었다.

《하기야 그들이 들어와 가져가군 하는것은 기껏해야 쌀 몇섬과 천, 옷가지 같은것 한짐씩밖에는 없는데 사실 이건 보잘것 없는것이요.

그런데 그까짓 쌀섬과 옷가지들때문에 수많은 남녀로소들을 죽이고 두 나라의 관계까지 적대국으로 갈라놓은 후과를 끼치고있으니 가져가는것보다 남겨놓고가는것이 얼마나 더 큰것이요!》

《…》

이마가와는 얼굴이 붉어졌다. 노해서가 아니라 느끼는바가 있어 부끄러움이 들었던 모양이다.

이때 정몽주는 조폭한 왜놈들의 성격을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감복될수 있도록 침착하고 도량있게 설득시켜나갔다.

《우리가 어찌 쌀 몇섬, 옷 몇가지로 서로 원쑤지간이 되고 생명까지 잃는 참상을 빚어놓아야 하겠습니까. 서로 화친하여 남는것은 주고 부족한것은 받으면서 살아가면 어찌 그런 페단과 참상이 또다시 생기겠습니까. 앞으로 두 나라가 깊은 우호관계를 맺고 백성들의 생활을 함께 보살펴나간다면 두 나라가 다 다행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시는 말뜻을 알겠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지난 기간 우리 백성들이 저지른 일에 대해서 사죄합니다. 앞으로 우리 사람들이 불법으로 그 나라에 침습하여 략탈하는것을 금지시키겠나이다.》

《그러면 우리도 당신네들이 필요한 물품들을 마음대로 무역할 길을 열어주겠습니다.》

《그렇게 하여주시면 참으로 고맙겠습니다.》

정몽주와 이마가와의 담판은 이렇게 순조롭게 번지여나가 결국 정몽주가 목적한바대로 평화교섭이 이루어졌다.

이마가와는 정몽주의 요구대로 우선 자기네 사람들이 절대로 고려땅에 침습하는 일이 없게 하겠다는것과 앞으로 서로 왕래하며 무역을 활발히 진행하면서 친교를 맺고 살아가겠다는것을 다짐하게 되였다.

그리고 이마가와는 정몽주의 지식과 덕행, 도량에 감동되여 성의껏 대접하고 환대하면서 자기들에게 학문을 강의해줄것을 청했고 좋은 시를 지어주기를 바랬다.

정몽주는 그들의 청대로 승려들을 데려다가 학문에 대한 강론도 하고 시도 써주었다.

그러자 승려들과 일본사람들이 고려의 훌륭한 학자이며 시인을 만났다고 기뻐하면서 정몽주를 가마에 태워 곳곳의 명승지까지 구경시키며 극진하게 대우하여주었다.

정몽주는 이와 같이 자기 목적을 실현한 후 일본사람들의 극진한 대우를 받으며 지내다가 1378년 7월에 고국으로 무사히 돌아오게 되였다.

정몽주가 떠나올 때 이마가와는 매우 섭섭해하면서 성대한 환송연회도 차려주었으며 왜구들이 잡아갔던 고려사람 수백명을 10척의 배까지 내주어 정몽주와 함께 귀국하도록 하여주었다.